
바다를 보기 위해 산에 올랐다. 멀찍이 떨어져서 겨울 바다의 적막함을 완상하기 위해서다.
닭벼슬처럼 생겨 툭 튀어나온 태안반도의 끝자락. 리아스식 해안의 전범을 보여주는 해안가는 기암이 어울린 아름다운 백사장들이 목걸이 구슬처럼 줄줄이 꿰어있다. 1978년 13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태안해안국립공원이다.
국립공원의 중심인 만리포와 천리포해수욕장으로 겨울바다 기행을 떠났다. 걸음이 향한 곳은 바다가 아닌 산이다. 태안해안국립공원의 절경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곳이다.
가운데 곶처럼 돌출된 자그마한 동산이 만리포와 천리포 해수욕장을 잇고 있다. 두 백사장의 배후엔 긴 산자락이 누워있다. 정상 국사봉의 높이가 121.8m로 산세는 높지 않지만 바닷가에 바로 붙어있어 조망 하나는 끝내준다.
산행길은 천리포에서 시작해 만리포로 내려온다. 천리에 만리를 더한 '일만일천리'의 풍경을 만끽하는 걸음이다. 실제 걷는 것은 4km도 안되는 거리이니 저절로 축지의 술법이 부려지는 걸음이다.
천리포해수욕장 뒤편, 천리포수목원 생태교육관 앞에서 산행이 시작됐다. '천리포 1길'이란 골목길에서 집 한 채를 돌자 밭두렁 옆으로 산길이 이어졌다.
지난 밤 내린 눈으로 산의 능선은 하얗게 설화를 피워댔다. 길 위에도 얇게 눈이 깔렸다. 발자국에 얇은 눈이 녹아버린다. 하얀 화선지에 수묵화의 댓잎을 치는 것처럼 지난 발걸음마다 먹물이 스몄다.
예상치 못한 화사한 눈선물에 마음은 마치 첫눈을 만났을 때처럼 들떠 동동거렸다. 산길이 깊어지며 눈은 발목까지 차올랐다. 다행히 길은 미끄럽지 않았고, 스패치와 아이젠으로 무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걸을 만 했다.
오르막마다 나무를 박은 계단이 길게 놓여져 어렵지 않게 눈길을 오를 수 있었다. 조금 오르다 뒤를 돌아보니 천리포 백사장 앞 닭섬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했다. 간조때라 물이 빠져 닭섬과 천리포 백사장이 이어져 있었다.
숲길을 둘러싼 나무는 죄다 소나무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는 듯 하얀 눈을 이고 있는 솔숲이 이국적이다. 바닥의 솔잎과 눈이 함께 완충해서인지 산길은 유난히 푹신했다.
첫 오르막을 오르고 나서 평탄한 능선길이 시작되는 곳에 이정표 2개가 나란히 서있다. 서로 다른 모양인 것을 보니 한 날에 세워진 것은 아닌가 보다.
좀더 새 것인 이정표는 국사봉까지 1km를 가리켰다. 바로 옆 다른 이정표는 국사봉까지 0.9km라고 써있다. 이정표대로라면 그새 100m가 줄어들었다. 산행객에게 중요한 이정표를 누군가 대충 꽂아놓은 것이다.
이 코스가 정말 재미있는 첫번째 이유는 적절한 오르막이 리듬을 타듯 이어진다는 것이다. 땀 좀 날만 하면 금세 평탄한 능선길이 연결돼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두번째는 시작부터 끝까지 소나무 숲길을 지나는 것이고, 세번째는 바다를 계속 내려다 보고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눈이 쌓인 솔숲의 한적한 산행길. 솔향에 설향까지 더해져 마음이 하얗고 상쾌하게 정화되는 느낌이다.
마침내 국사봉 정상에 섰다. 닭섬을 중심점 삼아 컴퍼스를 돌리듯 천리포 바다가 둥그렇게 원을 그렸다. 왼편으론 만리포가 아련한 해무 속에서 또 다른 큰 포물선을 그렸다. 설경의 만리포, 설화가 피어난 천리포 풍경이다.
바다를 느끼는 또 다른 방법이다. 멀찍이서 가슴을 두근거리며 누군가를 간절히 바라보듯 바다를 선망하는 시선이다.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다 눈을 들어보니 하염없이 내리던 눈발이 언젠지 모르게 그쳐 있었다. 고요한 하얀 적막. 닭섬에 부딪는 파도소리가 눈 덮인 숲 위로 퍼져 올랐다.
2007년 12월 태안의 아름다운 바다에 들이닥쳤던 검은 기름의 참사를 떠올렸다. 오염의 흔적은 지워진 지 오래지만 오염의 아픈 기억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을 터. 소복하게 내린 하얀 눈이 그 기억마저 다 덮어버렸다. 이보다 맑고 순정한 바다가 또 있을까.
만리포해수욕장까지 산길을 이어 내려왔다. 도중에 국2봉, 국3봉 등의 이름을 한 전망포인트가 더 나타났다. 만리포가 좀 더 잘 보이는 곳들이다.
산길을 다 내려와 도착한 곳은 만리포해수욕장 입구의 주차장이다. 2시간도 채 안된 시간에 천리포와 만리포를 잇고 바다와 산을 이었다.
